문화혁명 이후에는 더욱 도태되고 개편되어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희곡은 매우 적어졌다. 그 대부분이 영웅담이며, 이 1막은 청년의 뒤를 따르는 이승과 늙은 뱃사공이 주고받는 대사에 경묘한 극술(劇術)이 흥미를 갖게 한다. 그 밖에 민간설화나 소설 종류를 취재하여 희곡화한 작품도 있다. 경극의 무대 중국의 극장이 어떠한 역사를 갖고 어떠한 구조를 지녔느냐에 대해서는 유럽의 극장사(劇場史)처럼 정확하지는 않다. 오늘날에 와서는 중국의 고전극이라고 하면 바로 경극을 가리키며 마치 중국 고전극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다. 그것은 자유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북경을 북평(北平)이라 개칭하였기 때문이나 지금은 다시 경극으로 불리고 있다. 이 구조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말하자면 포튠극장이라든가 그로브 극장 등 런던에 있었던 극장과 흡사했다. 희붕(戱棚)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은 노천에 천막 정도를 친 것으로서 초기에는 읍이나 마을의 광장, 한마디로 말해서 북경에서 육성된 연극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
●경극
●경극
경극
경극(중국어 간체: 京, 정체: 京劇, 병음: Jngju 징쥐) 또는 경희(京戱)는 중국 연극 가운데 하나로, 한마디로 말해서 북경에서 육성된 연극이라는 의미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중국의 고전극이라고 하면 바로 경극을 가리키며 마치 중국 고전극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다. 그런만큼 연극으로서도 지금까지의 여러 유파나 계통의 예능이 집약되고 세련되어 민중의 지지도 컸었다. 경극은 넓은 지역에 걸친 각지의 연극이나 모든 예능이 청나라 중기 전후 수도 북경에 모여져 거기서 경극이라는 형태로 대성되었다. 바꿔 말하면 중앙집권주의에 의한 당시의 정권, 즉 청조 정부의 문교 정책과 민중의 취향에 그 기본 가곡인 서피(西皮)와 이황(二黃)이 널리 합치하고, 더구나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명배우를 배출하였다는 것이 경극이 발전 형성된 이유라고 하겠다. 그러나 한때는 경극을 평극(平劇)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그것은 자유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북경을 북평(北平)이라 개칭하였기 때문이나 지금은 다시 경극으로 불리고 있다.
경극의 희곡
경극의 희곡각본은 3,8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도군기(陶君起)의 `경극극목초탐(京劇劇目初探)`에는 1천여종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없어진 곡이 많으며 특히 중국의 공산화과정에서, 문화혁명 이후에는 더욱 도태되고 개편되어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희곡은 매우 적어졌다. 대체로 명나라 이전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이 많으며, 전국시대의 이야기인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를 비롯하여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등의 각색물이 압도적이다. 그 밖에 민간설화나 소설 종류를 취재하여 희곡화한 작품도 있다. 그 대부분이 영웅담이며, 권선징악적이고 비련의 이야기로서 봉건색이 매우 짙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바로 이른바 중공의 문화혁명에서 숙청의 대상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흔히 명작이라고 하는 작품 가운데에서 오늘날까지 자주 상연되어 인기가 있는 것을 몇 가지 들어보면 `귀비취주(貴妃醉酒)` `요천궁(鬧天宮)` `추강(秋江)` `우주봉(宇宙鋒)` `삼차구` `패왕별희(覇王別姬)` `유원경몽(遊園驚夢)` `단교정(斷橋亭)` 등이 있으며 모두 명배우 메이란팡(梅蘭芳)이 생전에 능숙한 연기를 보였던 작품들이다.
`귀비취주`는 현종을 기다리다 못해 쓸쓸함을 술로 달래는 양귀비의 심정을 애절하게 나타낸 곡으로서 메이란팡의 귀비역은 뛰어난 것이었다.
`요천궁`은 손오공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이다.
`추강`은 원래 곤곡의 `옥잠기(玉簪記)`의 한 장면인 `추별(追別)`이 원본이 되고, 지방극인 사천극(四川劇)에서 재평가되어 경극에서도 자주 상연된 것이다. 젊은 이승(尼僧)과 청년의 사랑 이야기로서, 이 1막은 청년의 뒤를 따르는 이승과 늙은 뱃사공이 주고받는 대사에 경묘한 극술(劇術)이 흥미를 갖게 한다.
이 밖에 `타어살가(打魚殺家)` `장상화(將相和)` 등은 중공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자주 상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경극의 무대
중국의 극장이 어떠한 역사를 갖고 어떠한 구조를 지녔느냐에 대해서는 유럽의 극장사(劇場史)처럼 정확하지는 않다. 희붕(戱棚)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은 노천에 천막 정도를 친 것으로서 초기에는 읍이나 마을의 광장, 또는 절의 앞뜰에 이 희붕을 세워, 가설흥행이라기보다 구경거리로서 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에도 북경의 번화가로서 유명했던 천교(天橋)에는 상설의 가마니를 친 희붕이 있어 이를 천교대붕(天橋大棚)이라 했으며 배우를 포붕이라고 불렀다.
극장으로서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북경의 광화루(廣和樓)였다. 건륭 연간(乾隆年間)에 창설되었다고 하며, 건륭제도 자주 구경을 다녔다고 전해진다. 수용인원은 약 7, 8백명으로 2층 건물이다. 정면 중앙에 3칸 4방의 무대가 객석을 향해 나와 있었다. 이 구조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말하자면 포튠극장이라든가 그로브 극장 등 런던에 있었던 극장과 흡사했다. 무대와 객석 사이는 칸막이나 커튼으로 가리지 않아 객석과의 융합을 꾀했다는 점에 흥미가 있다. 따라서 근대적인 극장과는 달리 연출형식에서 배우의 연기 등 모두가 리얼한 근대극의 방법을 취하여 저절로 이질적이며 색다른 형식이 생겨났다.
이러한 극장이나 무대의 형식은 상당히 후세에 와서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나 그 원형으로 생각되는 형태는 오래전에 존재했음이 최근에 와서 입증되기도 했다. 그것은 원본(院本) 유행시대인 금나라 시대의 무대와 원곡(元曲) 융성기의 무대로서 산시 성 차오청 현의 광승사(廣勝寺) 벽화에 그려진 원나라 시대의 태정 원년(泰定元年, 1324) 무렵의 무대이며 무대 위에는 충도수(忠都秀)라는 순회공연의 배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완취안 현의 후토묘(後土廟)에는 원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대가 그대로 남아 있음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산시성의 서남부인 임분(臨汾:金代의 平陽府) 근방인 후마 시의 교외에 있는 무덤에서 금나라 시대의 무대와 배우의 모형이 발견되고 더구나 대안(大安) 2년(1210)이라는 시대도 명확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북경의 극장
중공정권하에서, 특히 소위 문화혁명 이후에는 북경의 극장도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으나, 그 이전의 극장은 북경 시내에만 해도 30여 개나 있었다.
광화루(廣和樓), 광화희원(廣和戱院)은 가장 오랜 극장의 하나로서 부연성(富連成) 등의 명배우가 이곳을 근거로 활약했었다.
화락희원(華樂戱院)도 중화민국 9년에 창립했으며 그 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32년에 신축, 이곳도 메이란팡의 뒤를 이은 경극의 이름난 여역(女役)인 정연추(程硯秋)나 한세창(韓世昌)을 세상에 배출했다.
신신희원(新新戱院)은 크기와 새로움이란 점에서 북경 제1이었으나 연극보다도 영화의 상영이 더 활발했다. 이것은 다른 희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으며 영화관으로 전향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우선 전통이 오랜 것을 살펴 보면 청말(淸末)에 창설되고 중화민국 3년에 재건된 길상희원(吉祥戱院), 명배우 담금배의 중화희원(中和戱院), 선려지(鮮麗芝)의 광덕희원(廣德戱院, 舊 廣德樓), 유희규(劉喜奎)의 삼경희원(三慶戱院), 처음으로 여성관객을 허락했다는 화북희원(華
오늘날에 와서는 중국의 고전극이라고 하면 바로 경극을 가리키며 마치 중국 고전극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다. 수용인원은 약 7, 8백명으로 2층 건물이다. 경극의 무대 중국의 극장이 어떠한 역사를 갖고 어떠한 구조를 지녔느냐에 대해서는 유럽의 극장사(劇場史)처럼 정확하지는 않다. 수용인원은 약 7, 8백명으로 2층 건물이다. 바꿔 말하면 중앙집권주의에 의한 당시의 정권, 즉 청조 정부의 문교 정책과 민중의 취향에 그 기본 가곡인 서피(西皮)와 이황(二黃)이 널리 합치하고, 더구나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명배우를 배출하였다는 것이 경극이 발전 형성된 이유라고 하겠다. 젊은 이승(尼僧)과 청년의 사랑 이야기로서, 이 1막은 청년의 뒤를 따르는 이승과 늙은 뱃사공이 주고받는 대사에 경묘한 극술(劇術)이 흥미를 갖게 한다. ●경극 등록 XN . 신신희원(新新戱院)은 크기와 새로움이란 점에서 북경 제1이었으나 연극보다도 영화의 상영이 더 활발했다.. 그러나 한때는 경극을 평극(平劇)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우선 전통이 오랜 것을 살펴 보면 청말(淸末)에 창설되고 중화민국 3년에 재건된 길상희원(吉祥戱院), 명배우 담금배의 중화희원(中和戱院), 선려지(鮮麗芝)의 광덕희원(廣德戱院, 舊 廣德樓), 유희규(劉喜奎)의 삼경희원(三慶戱院), 처음으로 여성관객을 허락했다는 화북희원(華. ●경극 등록 XN . 무대와 객석 사이는 칸막이나 커튼으로 가리지 않아 객석과의 융합을 꾀했다는 점에 흥미가 있 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바로 이른바 중공의 문화혁명에서 숙청의 대상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극장이나 무대의 형식은 상당히 후세에 와서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나 그 원형으로 생각되는 형태는 오래전에 존재했음이 최근에 와서 입증되기도 했다. 그런만큼 연극으로서도 지금까지의 여러 유파나 계통의 예능이 집약되고 세련되어 민중의 지지도 컸었다.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에도 북경의 번화가로서 유명했던 천교(天橋)에는 상설의 가마니를 친 희붕이 있어 이를 천교대붕(天橋大棚)이라 했으며 배우를 포붕이라고 불렀다. 그 밖에 민간설화나 소설 종류를 취재하여 희곡화한 작품도 있다. 경극의 무대 중국의 극장이 어떠한 역사를 갖고 어떠한 구조를 지녔느냐에 대해서는 유럽의 극장사(劇場史)처럼 정확하지는 않다. 이것은 다른 희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으며 영화관으로 전향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귀비취주`는 현종을 기다리다 못해 쓸쓸함을 술로 달래는 양귀비의 심정을 애절하게 나타낸 곡으로서 메이란팡의 귀비역은 뛰어난 것이었다. 극장으로서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북경의 광화루(廣和樓)였다. ●경극 등록 XN . 희붕(戱棚)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은 노천에 천막 정도를 친 것으로서 초기에는 읍이나 마을의 광장, 또는 절의 앞뜰에 이 희붕을 세워, 가설흥행이라기보다 구경거리로서 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건륭 연간(乾隆年間)에 창설되었다고 하며, 건륭제도 자주 구경을 다녔다고 전해진다. ●경극 등록 XN . 정면 중앙에 3칸 4방의 무대가 객석을 향해 나와 있었다. 극장으로서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북경의 광화루(廣和樓)였다. ●경극 등록 XN . 흔히 명작이라고 하는 작품 가운데에서 오늘날까지 자주 상연되어 인기가 있는 것을 몇 가지 들어보면 `귀비취주(貴妃醉酒)` `요천궁(鬧天宮)` `추강(秋江)` `우주봉(宇宙鋒)` `삼차구` `패왕별희(覇王別姬)` `유원경몽(遊園驚夢)` `단교정(斷橋亭)` 등이 있으며 모두 명배우 메이란팡(梅蘭芳)이 생전에 능숙한 연기를 보였던 작품들이다. 북경의 극장 중공정권하에서, 특히 소위 문화혁명 이후에는 북경의 극장도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으나, 그 이전의 극장은 북경 시내에만 해도 30여 개나 있었다. 대체로 명나라 이전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이 많으며, 전국시대의 이야기인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를 비롯하여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등의 각색물이 압도적이다. ●경극 등록 XN . 이것은 다른 희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하겠으며 영화관으로 전향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그리고 이러한 점 때문에 바로 이른바 중공의 문화혁명에서 숙청의 대상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원본(院本) 유행시대인 금나라 시대의 무대와 원곡(元曲) 융성기의 무대로서 산시 성 차오청 현의 광승사(廣勝寺) 벽화에 그려진 원나라 시대의 태정 원년(泰定元年, 1324) 무렵의 무대이며 무대 위에는 충도수(忠都秀)라는 순회공연의 배우가 있었다고 한다. 이 밖에 `타어살가(打魚殺家)` `장상화(將相和)` 등은 중공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자주 상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한때는 경극을 평극(平劇)이라고 부른 적도 있었다. 대체로 명나라 이전의 역사에서 취재한 것이 많으며, 전국시대의 이야기인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를 비롯하여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등의 각색물이 압도적이다. 우선 전통이 오랜 것을 살펴 보면 청말(淸末)에 창설되고 중화민국 3년에 재건된 길상희원(吉祥戱院), 명배우 담금배의 중화희원(中和戱院), 선려지(鮮麗芝)의 광덕희원(廣德戱院, 舊 廣德樓), 유희규(劉喜奎)의 삼경희원(三慶戱院), 처음으로 여성관객을 허락했다는 화북희원(華.●경극 ●경극 경극 경극(중국어 간체: 京, 정체: 京劇, 병음: Jngju 징쥐) 또는 경희(京戱)는 중국 연극 가운데 하나로, 한마디로 말해서 북경에서 육성된 연극이라는 의미이다. 희붕(戱棚)이라는 말이 있으나 이것은 노천에 천막 정도를 친 것으로서 초기에는 읍이나 마을의 광장, 또는 절의 앞뜰에 이 희붕을 세워, 가설흥행이라기보다 구경거리로서 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자유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북경을 북평(北平)이라 개칭하였기 때문이나 지금은 다시 경극으로 불리고 있다. 그것은 원본(院本) 유행시대인 금나라 시대의 무대와 원곡(元曲) 융성기의 무대로서 산시 성 차오청 현의 광승사(廣勝寺) 벽화에 그려진 원나라 시대의 태정 원년(泰定元年, 1324) 무렵의 무대이며 무대 위에는 충도수(忠都秀)라는 순회공연의 배우가 있었다고 한다. 경극의 희곡 경극의 희곡각본은 3,8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도군기(陶君起)의 `경극극목초탐(京劇劇目初探)`에는 1천여종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완취안 현의 후토묘(後土廟)에는 원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대가 그대로 남아 있음이 발견되었다. ●경극 등록 XN . 따라서 근대적인 극장과는 달리 연출형식에서 배우의 연기 등 모두가 리얼한 근대극의 방법을 취하여 저절로 이질적이며 색다른 형식이 생겨났다. 그러나 없어진 곡이 많으며 특히 중국의 공산화과정에서, 문화혁명 이후에는 더욱 도태되고 개편되어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희곡은 매우 적어졌다. 젊은 이승(尼僧)과 청년의 사랑 이야기로서, 이 1막은 청년의 뒤를 따르는 이승과 늙은 뱃사공이 주고받는 대사에 경묘한 극술(劇術)이 흥미를 갖게 한다. 중화민국이 수립된 뒤에도 북경의 번화가로서 유명했던 천교(天橋)에는 상설의 가마니를 친 희붕이 있어 이를 천교대붕(天橋大棚)이라 했으며 배우를 포붕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자유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북경을 북평(北平)이라 개칭하였기 때문이나 지금은 다시 경극으로 불리고 있다. 그 밖에 민간설화나 소설 종류를 취재하여 희곡화한 작품도 있다. `추강`은 원래 곤곡의 `옥잠기(玉簪記)`의 한 장면인 `추별(追別)`이 원본이 되고, 지방극인 사천극(四川劇)에서 재평가되어 경극에서도 자주 상연된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는 중국의 고전극이라고 하면 바로 경극을 가리키며 마치 중국 고전극의 대명사처럼 되어 버렸다. 그 대부분이 영웅담이며, 권선징악적이고 비련의 이야기로서 봉건색이 매우 짙다고 하겠다. `추강`은 원래 곤곡의 `옥잠기(玉簪記)`의 한 장면인 `추별(追別)`이 원본이 되고, 지방극인 사천극(四川劇)에서 재평가되어 경극에서도 자주 상연된 것이다. 이 구조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말하자면 포튠극장이라든가 그로브 극장 등 런던에 있었던 극장과 흡사했다.●경극 등록 XN . 북경의 극장 중공정권하에서, 특히 소위 문화혁명 이후에는 북경의 극장도 커다란 변혁을 가져왔으나, 그 이전의 극장은 북경 시내에만 해도 30여 개나 있었다.●경극 ●경극 경극 경극(중국어 간체: 京, 정체: 京劇, 병음: Jngju 징쥐) 또는 경희(京戱)는 중국 연극 가운데 하나로, 한마디로 말해서 북경에서 육성된 연극이라는 의미이다. 흔히 명작이라고 하는 작품 가운데에서 오늘날까지 자주 상연되어 인기가 있는 것을 몇 가지 들어보면 `귀비취주(貴妃醉酒)` `요천궁(鬧天宮)` `추강(秋江)` `우주봉(宇宙鋒)` `삼차구` `패왕별희(覇王別姬)` `유원경몽(遊園驚夢)` `단교정(斷橋亭)` 등이 있으며 모두 명배우 메이란팡(梅蘭芳)이 생전에 능숙한 연기를 보였던 작품들이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산시성의 서남부인 임분(臨汾:金代의 平陽府) 근방인 후마 시의 교외에 있는 무덤에서 금나라 시대의 무대와 배우의 모형이 발견되고 더구나 대안(大安) 2년(1210)이라는 시대도 명확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바꿔 말하면 중앙집권주의에 의한 당시의 정권, 즉 청조 정부의 문교 정책과 민중의 취향에 그 기본 가곡인 서피(西皮)와 이황(二黃)이 널리 합치하고, 더구나 오랜 세월을 두고 많은 명배우를 배출하였다는 것이 경극이 발전 형성된 이유라고 하겠다. `요천궁`은 손오공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이다. 경극은 넓은 지역에 걸친 각지의 연극이나 모든 예능이 청나라 중기 전후 수도 북경에 모여져 거기서 경극이라는 형태로 대성되었다. 신신희원(新新戱院)은 크기와 새로움이란 점에서 북경 제1이었으나 연극보다도 영화의 상영이 더 활발했다. 화락희원(華樂戱院)도 중화민국 9년에 창립했으며 그 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32년에 신축, 이곳도 메이란팡의 뒤를 이은 경극의 이름난 여역(女役)인 정연추(程硯秋)나 한세창(韓世昌)을 세상에 배출했다. 그 대부분이 영웅담이며, 권선징악적이고 비련의 이야기로서 봉건색이 매우 짙다고 하겠다. 정면 중앙에 3칸 4방의 무대가 객석을 향해 나와 있었다. 이 구조는 셰익스피어 시대의 말하자면 포튠극장이라든가 그로브 극장 등 런던에 있었던 극장과 흡사했다. 화락희원(華樂戱院)도 중화민국 9년에 창립했으며 그 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32년에 신축, 이곳도 메이란팡의 뒤를 이은 경극의 이름난 여역(女役)인 정연추(程硯秋)나 한세창(韓世昌)을 세상에 배출했다. 광화루(廣和樓), 광화희원(廣和戱院)은 가장 오랜 극장의 하나로서 부연성(富連成) 등의 명배우가 이곳을 근거로 활약했었다. 그러나 없어진 곡이 많으며 특히 중국의 공산화과정에서, 문화혁명 이후에는 더욱 도태되고 개편되어 지금까지 생명을 유지하는 희곡은 매우 적어졌다. ●경극 등록 XN . 경극은 넓은 지역에 걸친 각지의 연극이나 모든 예능이 청나라 중기 전후 수도 북경에 모여져 거기서 경극이라는 형태로 대성되었다. `귀비취주`는 현종을 기다리다 못해 쓸쓸함을 술로 달래는 양귀비의 심정을 애절하게 나타낸 곡으로서 메이란팡의 귀비역은 뛰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산시성의 서남부인 임분(臨汾:金代의 平陽府) 근방인 후마 시의 교외에 있는 무덤에서 금나라 시대의 무대와 배우의 모형이 발견되고 더구나 대안(大安) 2년(1210)이라는 시대도 명확하게 나타났다고 한다. 이 밖에 `타어살가(打魚殺家)` `장상화(將相和)` 등은 중공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자주 상연되어 호평을 받았다. 건륭 연간(乾隆年間)에 창설되었다고 하며, 건륭제도 자주 구경을 다녔다고 전해진다.. 또한 완취안 현의 후토묘(後土廟)에는 원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무대가 그대로 남아 있음이 발견되었다. ●경극 등록 XN . 따라서 근대적인 극장과는 달리 연출형식에서 배우의 연기 등 모두가 리얼한 근대극의 방법을 취하여 저절로 이질적이며 색다른 형식이 생겨났다. 그런만큼 연극으로서도 지금까지의 여러 유파나 계통의 예능이 집약되고 세련되어 민중의 지지도 컸었다. `요천궁`은 손오공을 주인공으로 하는 연극이다. 경극의 희곡 경극의 희곡각본은 3,8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도군기(陶君起)의 `경극극목초탐(京劇劇目初探)`에는 1천여종이 수록되어 있다. 무대와 객석 사이는 칸막이나 커튼으로 가리지 않아 객석과의 융합을 꾀했다는 점에 흥미가 있. 광화루(廣和樓), 광화희원(廣和戱院)은 가장 오랜 극장의 하나로서 부연성(富連成) 등의 명배우가 이곳을 근거로 활약했었다. ●경극 등록 XN .. ●경극 등록 XN . 이러한 극장이나 무대의 형식은 상당히 후세에 와서 완성된 것으로 여겨지나 그 원형으로 생각되는 형태는 오래전에 존재했음이 최근에 와서 입증되기도 했.